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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 7세

덤프버전 :



 
  [초대-제60대]  
  [제61-120대]  
  [제121-180대]  

제121대제122대제123대제124대제125대
란도요한 10세레오 6세스테파노 7세요한 11세
제126대제127대제128대제129대제130대
레오 7세스테파노 8세마리노 2세아가피토 2세요한 12세
제131대제132대제133대제134대제135대
베네딕토 5세레오 8세요한 13세베네딕토 6세베네딕토 7세
제136대제137대제138대제139대제140대
요한 14세요한 15세그레고리오 5세실베스테르 2세요한 17세
제141대제142대제143대제144대제145대
요한 18세세르지오 4세베네딕토 8세요한 19세베네딕토 9세
제146대제147대제148대제149대제150대
실베스테르 3세베네딕토 9세그레고리오 6세클레멘스 2세베네딕토 9세
제151대제152대제153대제154대제155대
다마소 2세레오 9세빅토르 2세스테파노 9세니콜라오 2세
제156대제157대제158대제159대제160대
알렉산데르 2세그레고리오 7세빅토르 3세우르바노 2세파스칼 2세
제161대제162대제163대제164대제165대
젤라시오 2세갈리스토 2세호노리오 2세인노첸시오 2세첼레스티노 2세
제166대제167대제168대제169대제170대
루치오 2세에우제니오 3세아나스타시오 4세하드리아노 4세알렉산데르 3세
제171대제172대제173대제174대제175대
루치오 3세우르바노 3세그레고리오 8세클레멘스 3세첼레스티노 3세
제176대제177대제178대제179대제180대
인노첸시오 3세호노리오 3세그레고리오 9세첼레스티노 4세인노첸시오 4세

  [제181-240대]  

제181대제182대제183대제184대제185대
알렉산데르 4세우르바노 4세클레멘스 4세그레고리오 10세인노첸시오 5세
제186대제187대제188대제189대제190대
하드리아노 5세요한 21세니콜라오 3세마르티노 4세호노리오 4세
제191대제192대제193대제194대제195대
니콜라오 4세첼레스티노 5세보니파시오 8세베네딕토 11세클레멘스 5세
제196대제197대제198대제199대제200대
요한 22세베네딕토 12세클레멘스 6세인노첸시오 6세우르바노 5세
제201대제202대제203대제204대제205대
그레고리오 11세우르바노 6세보니파시오 9세인노첸시오 7세그레고리오 12세
제206대제207대제208대제209대제210대
마르티노 5세에우제니오 4세니콜라오 5세갈리스토 3세비오 2세
제211대제212대제213대제214대제215대
바오로 2세식스토 4세인노첸시오 8세알렉산데르 6세비오 3세
제216대제217대제218대제219대제220대
율리오 2세레오 10세하드리아노 6세클레멘스 7세바오로 3세
제221대제222대제223대제224대제225대
율리오 3세마르첼로 2세바오로 4세비오 4세비오 5세
제226대제227대제228대제229대제230대
그레고리오 13세식스토 5세우르바노 7세그레고리오 14세인노첸시오 9세
제231대제232대제233대제234대제235대
클레멘스 8세레오 11세바오로 5세그레고리오 15세우르바노 8세
제236대제237대제238대제239대제240대
인노첸시오 10세알렉산데르 7세클레멘스 9세클레멘스 10세인노첸시오 11세




파일:교황 문장.svg 가톨릭 교회의 교황
파일:251_pio_VII.png
제250대 비오 6세제251대 비오 7세제252대 레오 12세

파일:external/i209.photobucket.com/PopePiusVII.jpg
교황명비오 7세 (Pius VII)
본명바르나바 니콜로 마리아 루이지 키아라몬티
(Barnaba Niccolò Maria Luigi Chiaramonti)
출생지교황령 체세나
사망지교황령 로마
생몰년도1742년 8월 14일 ~ 1823년 8월 20일 (81세)
재위기간1800년 3월 14일 ~ 1823년 8월 20일 (23년 164일)
문장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51px-C_o_a_Pio_VII.svg.png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가톨릭의 제251대 교황. 재위 1800년 3월 14일 ~ 1823년 8월 20일(23년 5개월 6일). 교황 즉위와 사망 시기를 보면 알겠지만 18세기 최후의 교황이자 19세기 최초의 교황이다.

전임 교황 비오 6세나폴레옹에게 협력하길 거부했기 때문에 프랑스군에 감금된 상태에서 교황의 권위가 극도로 실추된 상태였다. 그 판국에 베네치아에서 오스트리아 군대의 보호를 받으며 1799년 12월 1일 개최된 콘클라베에서 비오 7세가 선출되었다.


2. 생애[편집]


비오 7세의 본명은 루이지 바르나바 키아라몬티(Luigi Barnaba Chiaramonti)이며, 1742년 태어났다. 16세에 베네딕토회에 입회하였고 비오 6세의 총애를 받아 1782년 티볼리 주교, 1785년 이솔라 주교를 역임하고 그 해에 추기경에 서임되었다. 1800년 3월 14일 교황으로 선출된 뒤 4달 만인 7월 3일 로마에 입성했으며, 시민들은 교황의 귀환을 환영했다.

1804년 나폴레옹이 스스로 제위에 오르자 그 대관식에 초청되었으나, 황관(皇冠)이나 왕관을 무릎을 꿇은 채 교황으로부터 씌워져 받는 이전의 황제(800년의 샤를마뉴)나 왕들과 달리 나폴레옹은 본인 스스로 선 채로 황관을 썼기에 교황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강복밖에 없었다. 그 후에도 나폴레옹은 14세기 프랑스 왕실이 제공한 아비뇽의 옛 교황령[1]에 거주할 것을 제안했으나 거절하고 로마로 돌아왔다. 이에 나폴레옹은 복수를 위해 1801년 7월 15일의 정교(政敎)조약[2]을 이탈리아에서도 시행하라며 교황을 압박했다. 특히 프랑스 전체를 관리하는 총대주교를 설정하고 그 임명권을 자기에게 위임할 것, 추기경단의 최소 1/3은 프랑스인으로 채울 것 등을 요구하였는데 교황은 이를 모조리 묵살하는 위엄을 보여주었다.

교황이 자기 요구를 몽땅 씹어버리자 분노한 나폴레옹은 군대를 파병, 1808년 2월 12일 로마를 점령하고, 9월 6일 교황 역시 억지로 성좌에서 끌려나와 감금당해야 했다. 그리고 나폴레옹은 황제 칙령으로 교황의 권한은 오로지 영적 영역에 한정된다고 선언했다. 그에 대해 교황은 1809년 6월 10일 나폴레옹을 파문하는 칙령을 공표해 대응했다. 패기 쩐다 나폴레옹의 어그로를 있는 대로 끈 셈이 된 교황은 즉시 프랑스군에 체포되어 1809년 8월 17일 제노바 인근 사보나로 이송되어 감금생활을 강요받았다.

교황이 감금, 유폐된 상태에서 나폴레옹은 유력한 추기경들에게 파리로 이주하도록 강요하고, 1811년 6월 17일 파리에서 국가 공의회를 열어 자기 뜻대로 가톨릭 교회를 주무르려고 했다. 허나 나폴레옹이 소집한 공의회임에도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온 주교들은 황제의 뜻을 따르지 않고, 오히려 독일의 뮌스터 주교가 교황의 석방을 제안, 공의회 전체의 동의를 얻어냈다.역관광 이에 분노한 나폴레옹은 7월 11일 공의회를 휴회(休會)시키고, 결의안을 주도한 주교 3명을 체포해 구금했다. 이어 8월 5일에 다시 국가 공의회를 열었으나 이번에도 주교들은 황제의 뜻에 복종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폴레옹은 10월에 다시 공의회를 해산시켜야 했다.

공의회를 통한 교회 통제가 뜻대로 안 되자 결국 나폴레옹은 러시아 원정을 코앞에 둔[3] 1812년 6월 19일 교황을 파리 근교의 퐁텐블로로 이송해 더 엄격한 관리 하에 두었으나, 나폴레옹이 러시아 원정에서 참패하면서 위기를 겪게 되자 교황과의 화해를 모색했다. 그래서 1813년 1월 19일 나폴레옹이 교황을 예방하였고, 신(新) 정교협약을 체결하기 위한 협상을 시작했다. 이 때 교황은 오랜 유폐생활로 심신이 쇠약해져서 그런지 나폴레옹에게 상당한 양보를 하였는데, 보수파 추기경들의 반발이 거세지자 교황도 잘못을 인정하고 나폴레옹에게 재협상을 요구했다. 정치, 군사적으로 점차 수세에 몰리던 나폴레옹은 교황의 지지라도 얻고자 교황의 요구를 받아들여 1813년 3월 24일 재협상을 시작했고, 1814년 1월 교황을 사보나로 보냈으며, 그 해 3월 10일 교황은 드디어 약 5년 동안의 유폐에서 풀려나 석방되어 로마로 돌아올 수 있었다.

나폴레옹의 몰락 이후 교황은 저항 정신의 화신이 되었다. 비오 7세 본인이 겪은 고초에 대해 유럽의 군주들은 동정적이었고(헨리 8세 이래로 바티칸과 오랫동안 반목했던 영국에서도 비오7세는 왕실에서 일반인에 이르기까지 큰 존경을 받았다), 그 덕에 비오 7세는 빈 회의에서 생각보다 큰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빈 회의를 통해 구체제의 복귀를 열강이 결정했기에 비오 7세도 나폴레옹이 없애버린 교황령을 회복할 수 있었다. 1815년 6월 9일 교회 국가가 다시 세워졌고, 교황은 1773년 열강의 압력으로 해산시켰던 예수회도 다시 조직할 수 있었다. 다만 중세 이래 세속 군주와 팽팽히 대립했던 주교 서임권은 이 무렵 완전히 잃어버렸다. 수도회 출신의 거룩한 성품과 인격을 구비한 사람이었던 비오 7세는 종전 후 프랑스를 떠날 수밖에 없었던 나폴레옹의 어머니 레티치아가 로마에 체류하는 것을 허락하고, 나폴레옹이 임종을 앞둔 때에는 절해고도에 고해 사제를 파견하여 나폴레옹의 마지막을 지켜주도록 함으로써, 원수를 은혜로 갚는 모습을 보여준다.오오 교황님 오오

나폴레옹의 파멸과 구 체제의 부활 같은 분위기 속에서 교황은 신성로마제국 해체의 여파를 고스란히 받고 있는 독일권에서 가톨릭 교회의 새로운 위상을 정립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이 '오래된 신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유럽 각국과 정교 협약을 체결하였다. 교황은 유럽 대부분의 나라에서 공석이 되어버린 주교들을 다시 임명했고, 수도원과 신학교를 재건하는데에 힘썼다.

교황은 전쟁으로 훼손된 로마 시가지의 재건축, 고대 로마 유적의 발굴과 복원작업에도 관심을 가졌으며, 세계 선교사업에도 열의를 보였다. 이에 따라 1822년 로마에 신앙의 전파를 담당하는 새로운 성(省)이 설립되었고, 1823년 교황청의 공식관청으로 인준되었다. 바티칸 미술관 내의 키아라몬티 미술관이 개관한 것도 비오 7세의 재위기간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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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비오 7세의 무덤, 베르텔 토르발센, 1823~1831년, 성 베드로 대성당
1823년 8월 20일, 81살을 일기로 사망했으며 시신은 성 베드로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01 20:50:16에 나무위키 비오 7세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당시에는 프랑스에 합병된 상태였다.[2] 프랑스 내 교구는 60개로 제한하고, 교구를 관리하는 주교들의 서임권은 나폴레옹이 가지며, 정부에 충성서약을 해야 한다. 교황의 칙령, 공의회 결정사항, 지역 시노드의 결의는 정부의 사후승인이 있어야 효력이 생긴다, 등등.[3] 러시아 침공은 1812년 6월 24일 시작되었다. 정확히는 러시아 지배에 놓인 폴란드를 공격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