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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노리오 1세
덤프버전 :
- 생몰년: ? ~ 638년 10월 12일
- 재위기간: 625년 10월 27일 ~ 638년 10월 12일
1. 개요[편집]
호노리오 1세는 가톨릭의 70대 교황이다.
2. 생애[편집]
교황이 이단으로 낙인 찍히는 희대의 사건을 일으킨다. 이것은 그가 이단이거나 정통 신앙에 반하려고 했다기보다는 학문적 소양이 부족했기 때문에 이런 문제가 터진 것이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 세르기오스는 단의론을 내세웠다. 이는 당시 동로마 제국 영토 내에서 단성론과 정통 삼위일체 신앙 사이의 갈등이 매우 심하였기에, 어느 정도 두 주장을 타협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단의론에서 예수에게 신성과 인성이 모두 있다고 말하는 것은 정통 신앙과 같되, 하나의 단일한 의지를 지닌다고 말하는 것은 단성론자를 위한 일종의 배려였다.
이런 타협이 나오게 된 것은 동로마 황제 이라클리오스의 의도도 있었다. 동로마 황제로서는 국가 운영상의 이유로 제국 동부 단성론 지역과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정통 삼위일체 신앙을 화해시켜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 예루살렘 총대주교가 반대 입장을 취하자 다시 호노리오 1세에게 이 문제에 대해 조회했다. 호노리오 1세는 세르기오스의 의견에 동조하는 서한을 보내고 마는데, 아마 동로마 제국과의 관계를 고려했을 것이다. 이를 토대로 해서 세르기오스는 '신앙의 정식'을 작성했고 이라클리오스 황제는 인정하였다.
그러나 애시당초 단성론의 문제는 '본성'과 '일치'의 문제가 아닌 예수의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의 두 본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근본적 문제였으니 이라클리오스와 호노리오의 사후 후임 교황들은 단의론에 반대하였고, 호노리오 1세 사후 43년이 흘러서 콘스탄티노스 4세 시대에 열린(681년) 제3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는 세르기오스가 작성한 신앙의 정식에 반대하였으며 예수에게 신성과 인성이 모두 있다고 결의하였다. 여기에 단초를 제공했던 호노리오 1세는 이단으로 낙인 찍혔고, 사후 공의회에서 파문되었다.
그는 생전 아리우스파주의자들의 회개를 촉구하고, 잉글랜드 선교에 힘쓰는 한편 교회 재산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등 많은 모범을 보인 교황이었다. 또한 로마의 건축물을 보존하고 중요한 복구하는데 힘을 쏟았다. 하지만 한 번의 사고로 인해 이후 두고두고 분란이 되는 씨앗을 만들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