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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 9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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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제152대 교황. 역사적으로 중세 시대의 가장 중요한 교황 중 하나로 손꼽힌다.
2. 생애[편집]
레오 9세는 전통적인 도덕상을 내세우며 가톨릭 개혁을 착수했다. 교황은 1049년 주님 부활 대축일에 소집된 시노드에서 성직자들의 혼인과 성직 매매를 반대하는 확고한 신념을 관철시켰다. 이듬해 1050년 예수 부활 대축일에 소집된 시노드에서는 성체성사 교리를 잘못 가르친 프랑스 왕국의 신학자 베렌가리우스의 주장을 단죄하는 문제를 다뤘다. 제3차 주님 부활 대축일 시노드에서는 성직 매매로 주교가 된 이들에 의해 사제품을 받은 사람들을 재서임해야 하는지에 대해 논쟁을 벌였다.
레오 9세는 당시 동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미카엘 케룰라리오스로부터 서신 하나를 받았는데, 서신에는 서방 교회가 효모를 넣지 않은 빵을 사용한다는 것과 단식일에 대해 비난하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미카엘 총대주교가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으로 받아들인 교황은 총대주교에게 <콘스탄티누스의 기증(Constitutum Donatio Constantini)>[2] 은 위조된 것이 아닌 실제로 콘스탄티누스 1세가 작성한 것이기 때문에 오직 베드로의 정통 후계자인 로마의 교황만이 전체 교회의 최고 수위권을 지니고 있다는 내용이 담긴 서신을 보냈다. 이렇게 동방 교회의 수장인 총대주교와 갈등을 빚은 교황은 선종하기 전에 실바칸디다의 훔베르트 추기경을 교황 특사로 임명한 후 동로마 제국으로 파견했다. 훔베르트 추기경은 총대주교를 파문한다는 칙서를 동방 교회 측에 전달했고,[3] 이에 반발한 미카엘 총대주교가 훔베르트 추기경을 포함한 교황 특사 수행원들을 파문하는 칙서를 공표하는 것으로 맞대응했다. 그렇게 1054년 동서 교회의 분열이 시작되었다.
그 외에도 남이탈리아로 온 노르만 원정대에게 맞서기 위해 (남이탈리아에 교황 장원이 많았다) 친정했는데, 사로잡혔지만 (노르만은 이미 가톨릭으로 개종한 후라서) 융숭하게 대접받았다. 여기서 힘을 키운 노르만족은 십자군 때 예루살렘도 가고 콘스탄티노플도 털고 했다.
[1] 오늘날은 프랑스의 계속된 동진으로 프랑스령이다.[2] 750년에서 850년 사이에 조작된 동로마 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가 교황 실베스테르 1세에게 쓴 것으로 알려진 위조 칙서다. 콘스탄티누스 1세가 로마 제국의 수도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천도하면서 로마와 제국의 서방 영토를 교황 실베스테르 1세와 그의 후계자들에게 넘기고, 대신 자신은 제국의 황제권을 보유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 조작된 칙서는 중세 시대 동안 세속의 황제에 대한 교황의 우위권을 주장하는 근거로 교황의 이익을 위해 사용되었다.[3] 당시 그가 동방 교회 측에 칙서를 전달했을 때 레오 9세는 이미 선종한 후였고, 교황의 특별한 지시 없이 단독적으로 행동한 일이었기 때문에 사실 교회법적으로 무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