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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크렘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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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저 맥케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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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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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1973년1974년
맥스 플라이셔데이브 플라이셔월터 란츠텍스 에이버리프리즈 프레렝
1974년1975년
척 존스아트 배빗윈저 맥케이그림 네트윅월트 디즈니
1975년1976년
존 허블리페이스 허블리노먼 맥라렌로버트 캐넌휴 하먼
1976년1977년
루돌프 이징마이클 말테스조지 팔워드 킴볼윌리엄 해나
1977년
조셉 바베라멜 블랭크오스카 피싱거빌 스콧밀트 칼
1978년
제이 워드어브 아이웍스딕 휴머칼 스탈링한스 콘리드
1979년1980년
클라이드 제로니미빌 멜렌데즈매 퀘스텔오토 메스머올리 존스턴
1980년1981년
프랭크 토머스칼 하워드폴 줄리안라번 하딩T. 히
1981년1982년
빌 피트빌 타이틀라존 휘트니켄 헤리스켄 엔더슨
1982년1983년
브루노 보제토준 포레이도날드 W. 그레이엄마크 데이비스에릭 라슨
1983년
프레드 무어클라렌스 내쉬볼프강 레이더먼레오 살킨스티븐 보수스토
1983년1984년
윌프레드 잭슨다우스 버틀러데이비드 핸드잭 키니마이클 라
1984년1985년
로버트 매킴슨리처드 윌리엄스해밀턴 러스크로버트 아벨프레스턴 블레어
1985년
조 그랜트존 핼러스스털링 홀러웨이짐 맥도날드필 먼로
1985년1986년
벤 워셤프레더릭 백샤머스 컬해니윌리엄 T. 허츠이르벤 스펜스
1986년1987년
에머리 호킨스존 란즈베리폴 드리센잭 해나빌 리틀존
1987년1988년
모리스 노블켄 오코너노먼 퍼거슨멜 쇼랠프 박시
1988년1989-1990년
밥 크렘펫티사 데이비드가와모토 기하치로버질 로스아트 클로키
1989-1990년
힉스 로키알렉스 로비돈 메식데즈카 오사무레스터 노브로스
1991년
레이 해리하우젠허버트 클린밥 커츠유리 노르슈테인조 시라쿠사
1991년1992년1993년
루스 키산레스 클라크스탠 프레버그데이비드 힐버만조지 더닝
1993년1994년
로이 E. 디즈니잭 잰더에드 베네딕트아서 데이비스장 밴더 필
1995년1996년
줄스 엥겔반스 게리댄 맥로린메리 블레어버니 매티슨
1996년1997년1998년
타카모토 이와오윌리스 H. 오브라이언마이런 왈드먼폴 윈첼에위빈드 얼
1998년1999년
미야자키 하야오어니스트 핀토프레이 패터슨마르셀 얀코비츠콘 페더슨
2000년
노먼 맥케이브호이트 커틴루실 블리스

21세기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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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2002년
빌 저스티스피트 알바라도밥 기븐스진 하젤튼플로이드 노먼
2002년2003년2004년
셔먼 형제진 디치존 헨치썰 라벤스크로프트돈 블루스
2004년2005년
버지니아 데이비스아놀드 스탱코니 콜프레드 크리펜타이러스 웡
2006년2007년
안드레아스 데자겐디 타르타콥스키빌 플림턴존 케인메이커글렌 킨
2007년2008년2009년
존 크릭팔루시마이크 저지존 라세터닉 파크팀 버튼
2009년2010년
제프리 카첸버그브루스 팀브래드 버드에릭 골드버그맷 그레이닝
2011년2012년
월터 페리고이뵈르게 링로널드 설테리 길리엄오스카 그릴로
2012년2013년2014년
마크 헨오토모 카츠히로스티븐 스필버그필 티페트디디에 브루너
2014년2015년
돈 러스크리 멘델슨조 랜프트필 로먼타카하타 이사오
2016년201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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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2018년201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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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2020년
헨리 셀릭론 클레먼츠존 머스커윌리 이토수 C. 니콜스
2020년2021년2022년
브루스 W. 스미스루벤 A. 아퀴노릴리언 슈워츠스즈키 토시오피트 닥터
2022년
에블린 램바트크레이그 맥크라켄






1. 개요
2. 생애
3. 여담
4. 작품 목록
5. 관련 인물
6.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Bob Clampett

본명은 Robert Emerson Clampett Sr이며, 미국 캘리포니아샌디에이고 출신 애니메이터, 퍼페티어, 애니메이션 감독. 1913.05.08. ~ 1984.05.02.


2. 생애[편집]


크렘펫의 부친은 아일랜드에서 태어나 어릴 때 가족들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했다고 하며, 크렘펫이 12살이 되었을 때(1925년) 집의 차고 안에서 단편 영화를 만들면서부터 예술 분야에 재능을 가꿔가기 시작하였다. 그가 할리우드에서 생활하는 동안 어머니와 함께 찰리 채플린의 옆집에서 머물며 살았으며, 아버지가 해롤드 로이드와 친한 사이였다고 한다.

10대 시절부터 애니메이션과 인형극에 흥미를 얻어갔던 크렘펫은, 고등학교를 다닐 때 그린 만화가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의 일요판에 게재되어 킹 피처스(King Features)[1]에서 신문사에서 만화가로써의 계약을 제안받기도 했으며 킹 피처스 내부의 미술 부서에서 토요일과 방학 기간에 일하며 오일로 그림을 그리는 방법과 조각을 만드는 방법을 공부하게 된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엔 본인의 이모가 일하던 인형 공장에서 일자리를 얻었으며, 시중에 판매할 아이템을 찾던 중에 크렘펫은 당시 인기가 올라갔던 미키 마우스를 기반으로 한 아이템을 파는 것이 어떻냐는 제안을 하였고 스케치를 영화관에 가져가서 직접 미키의 스케치를 그려 월트 디즈니 스튜디오로 이동하였다. 저작권 문제로 인해 마찰을 빚지는 않을지 우려했었지만 월트 디즈니와 로이 O. 디즈니는 그의 스케치를 보고 기뻐했으며 스튜디오와 멀지 않은 곳에서 사업을 시작하여 짧은 시간 동안 둘과 함께 일했다.

이 시기(1931년) 음성이 나오는 단편 애니메이션에 매료되었다고 훗날 회고했을 정도로 그에 몰입한 크렘펫은 1주일에 10달러를 급료로 받는 조건 하에 하먼-아이싱 스튜디오에 입사했으며, 리언 슐레진저는 크렘펫이 만든 16mm 필름 중 하나를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아 그한테 조수직을 제안했다고 한다. 워너 브라더스에서 일한 첫 번째 작업은 Lady, Play Your Mandolin의 보조 애니메이션 원화였으며, 프리즈 프레렝의 지도 하에 애니메이터의 역량을 길러나갔다.

비슷한 시기 리언은 본인이 제작자를 맡는 단편 애니메이션에 넣을 새 캐릭터를 찾는 방안에 대한 위기감을 느껴, 아이디어를 얻으러 스튜디오 차원으로써 방안을 진행했는데 이 때 크렘펫이 캠벨의 포크 앤 빈즈 캔 통조림의 상표 표지를 모방해 포키와 빈즈라는 돼지고양이 캐릭터가 있는 그림을 리언에게 제출해 냈다. 이 그림에서 포키는 이듬해(1935년) 프리즈가 감독한 I Haven't Got a Hat에서 데뷔하였으며, 크렘펫의 스토리 작가로써의 재능을 고평가한 리언은 다른 유닛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연출가 중 1명인 텍스 에이버리와 논의한 뒤에 그를 에이버리의 협력자로 지명해 같이 일하게 해주었다.

둘은 워너 브라더스의 관리 직원들이 썼던 허름한 목조 건물로 청소 용품을 포함한 도구들을 보관하기 위해 옮겼지만, 건물에서 스튜디오로써의 활용 가능성을 깨닫곤 척 존스, 버질 로스(Virgil Ross), 시드 서덜랜드(Sid Sutherland) 등의 애니메이터와 함께 그 곳에서 애니메이션 작업 활동을 했는데 (이 건물의) 별명을 터마이트 테라스[2]라고 붙였다. 크렘펫은 리언 슐레진저 프로덕션을 떠날 것을 계획 중이었지만 리언이 그한테 여기서 남는다면 더 많은 급료를 주겠다고 제안해 남기로 했으며, 1936년 후반에 디렉터로 승진하였다.

그 해에 재정적 문제로 난국을 겪고 있던 어브 아이웍스가 워너 브라더스에서 하청 제작했던 여러 단편들을 척 존스와 같이 연출하였고, 같은 해(1937년) 개봉된 Porky's Badtime Story 편부터 처음으로 크레딧에 본인의 이름이 기재된다. 1941년 가을에 에이버리가 MGM으로 이직하자 그가 활용했던 애니메이션 부서를 인수하였으며, 크렘펫은 에이버리가 제작하지 못한 단편들의 미완성 분량을 완성하기도 했다.

1945년 5월 크렘펫은 워너 브라더스 카툰즈를 떠났으며, 이듬해에 스크린 젬스로 이직해 컬럼비아 픽처스 카툰 부문의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하게 된다. 1947년 (리퍼블릭 픽처스가 상영한) It's a Grand Old Nag을 감독한 후 리퍼블릭 픽처스가 흥행 실패로 제작 예산이 삭감되어 카툰 제작을 중단한 뒤엔, 인형극 Time For Beany를 1949년 텔레비전에 방영할 수 있도록 제작하는 등 방송계로 활동지를 옮겼다.

말년엔 애니메이션의 역사를 강의하는 초빙 강사로 대학가의 캠퍼스와 애니메이션 페스티벌을 곳곳에서 참석하여 활동했으며, 1975년 유나이티드 아티스트가 배급한 '벅스 버니 슈퍼스타(Bugs Bunny The Superstar)' 다큐멘터리 영화에 출연해 인터뷰를 남기기도 했다. 9년 뒤 비니와 세실 카툰의 홈비디오 출시 기념 홍보를 위해 미국 전역을 순회하던 중 심장마비로 쓰러져,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3. 여담[편집]


  • 터마이트 테라스 내부의 애니메이터들과는 일하던 시기엔 별다른 이야기가 없었지만, 워너 브라더스를 떠나고 1946년에 한 잡지 기사 인터뷰와 bugs bunny the superstar(1975년 영화)에서 동료 감독들의 기여를 포함하지 않고 자신이 벅스 버니와 포키 피그의 창시자라 강조하며 말한 것을 두고 자기중심적이라고 1970년에 척 존스한테 디스당한 일이 있었는데, 5년 뒤(1975년)부터 본인을 만났던 사람들한테 텍스 에이버리한테 보냈던 편지를 복사해 배포해주기도 했다. 이후 1979년에 개봉한 척 자신의 총집편 영화 'The Bugs Bunny/Road Runner Movie'와 Chuck Amuck 등의 자서전에서도 크렘펫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거나 최대한 간략히 언급한 바 있었다.

  • 위의 주장에 밥의 개인적인 친분이 있던 애니메이션 역사가 밀턴 그레이는 에세이에서(애니메이션 역사가 마이클 배리어 홈페이지 참조) 업계의 라이벌 중 1명에 의한 고의적이고 악의적인 비방 캠페인이라고 반론했으며, 당시 에이버리의 비극적인 가정 생활로 인해 쉽게 그의 편이 되게끔 만들어 유도시켰고, 밥이 척의 비난을 알아챘지만 그에 대처하지 않고 오히려 깊게 슬퍼하였으며 척에 대해서도 나쁜 말을 한 적이 없다고 발언했다. 척이 라이벌인 밥에게 위협을 느끼고 행동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지만 척과 밥의 작품에 대해서 계속 찬사받기를 바란다고 인터뷰 말미에 언급하기도 했다. 당시 논란이 있던 와중에 생존해 있던 프리즈 프레렝, 로버트 매킴슨, 칼 W. 스털링 등의 루니 툰 업계인들도 이에 대해 어느 한 쪽을 편향해 옹호하진 않고 크렘펫을 비난한 일도 없었으며, 위의 에세이에 기재된 인터뷰에 의하면 텍스 에이버리도 편지를 받은 이후 척에게 남긴 반응에 대해 2년 뒤에 (밀턴한테) 사과한 모습을 보여줬기에 크렘펫이 루니 툰 단편을 연출하면서 보였던 (자신의) 재능에 취하여 인터뷰할 당시엔 여러모로 과다하게 허풍적인 면모를 보였던 것일 수도 있다.

  • 이후 2012년에 발매된 벅스 버니 슈퍼스타 DVD 코멘터리에서 영화를 감독했던 래리 잭슨(Rarry Jackson)은, 크렘펫이 다른 감독들의 기여를 언급하는 것을 매우 꺼렸으며 본인의 작품을 제공하는 과정에도 까다롭게 관여했다는 언급을 하였지만 래리 본인은 척과는 여러 년간 개인적인 친구 사이로도 있었다고 주장한 바 있었다. 생전 척과 밥 둘 사이에 완전한 화해는 이뤄지지 못했으며, 초창기엔 애니메이션 커뮤니티에서 유명한 논쟁거리가 되었지만 1990년대 이후 많은 업계인들이 세상을 떠나고 척과 밥의 작품에 대해 거리낌없이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이 늘어나며 논쟁이 재발할 기반도 사라지는 상황에 있다.

  • 크렘펫의 작품들은 1980년대 중기에 MGM/UA에서 1948년 8월 이전 개봉된 루니 툰 & 메리 멜로디즈 단편 모음 VHS를 발매한 것을 시작하여 1988년에는 니켈로디언에서, 1992년부턴 카툰 네트워크에서 크렘펫이 제작한 작품들이 지속적으로 방영되면서 그를 존경하는 팬들이 많이 늘어났으며, 황금기 이후 업계에 데뷔한 애니메이터들과 애니메이션 역사가들 중에서도 크렘펫의 작품을 칭찬하며 고평가하는 사람들도 속속 나타나기 시작했다.

  • 크렘펫이 연출한 작품들은 다른 루니 툰 감독들이 연출한 작품과 비교해볼 때 초현실주의적인 기법을 주로 활용해 출연하는 캐릭터들이 움직일 때 디자인이 자유분방하게 변하는 경향과 어떤 전개로 이어질 지 모를 불규칙적인 전개의 활용이 짙으며, 대피 덕과 벅스 버니는 좀더 괴팍하고 소시오패스적인 트릭스터로 행동하는 작품들이 많다. 또한 자신의 작품에서 어떠한 공식에 갇히는 것을 대체로 꺼려 그런 공식에 휘둘리는 위치에 있다고 느껴진 벅스 버니 단편은 많이 연출하지 않았다고 한다.

  • 크렘펫이 워너 브라더스를 떠나게 된 구체적인 계기는 자신이 애니메이션 분야를 넘어서 도전할 새로운 목표를 찾기 위한 것이란 목적도 있었지만, 제작 예산 내에서 애니메이터들의 자유로운 연출 스타일을 별반 문제삼지 않은 리언 슐레진저에 비해 교체된 제작자 에드워드 셀저가 부임한 초창기엔 그러한 관행에 덜 관대했던 영향도 작용했다고 한다. 출처 자료는 영어 위키피디아 밥 크렘펫 문서의 경력 문단 루니 툰 부분의 후반부 내용과 1969년 마이클 배리어와의 인터뷰 기사 내용을 참조하였다.

  • 1943년 개봉된 자신의 작품 Coal Black and De Sebben Dwarfs에 대해, (민권 운동 이후 정치적 올바름이 전반적인 영향력을 높여가던) 1970년대 즈음에 논쟁이 빚어지자 해명한 일이 있었다. 그 이후 크렘펫은 작품이 상영되는 자리에 참석했을 때마다 사과하면서 성명을 낭독한 일도 있었다고 한다.[3][4]

  • 크렘펫이 연출한 단편들에선 참여한 애니메이터들의 개별적인 드로잉 스타일을 쉽게 구별해 볼 수 있는데, 이는 크렘펫이 작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애니메이터들한테 자신의 스타일을 발휘할 수 있게끔 자유로운 환경을 제공해 줬던 것이 직접적인 배경이 되었다고 한다.

  • 루니 툰의 디렉터 중에서 헤이즈 오피스의 검열 체계를 은근슬쩍 작품에 출연한 캐릭터들이 비꼬는 대사들이나 헤이즈 코드가 규정한 금기에 살며시 도전하는 연출을 가장 많이 삽입한 연출가이기도 했다. 그래서 크렘펫이 연출한 단편들 중에선 제작 과정 중이나 재개봉 과정에서 부분적으로 검열된 사례들이 발생하기도 했는데, 각각 Farm Frolics, Hare Ribbin, Russian Rhapsody, Baby Bottleneck이 이에 해당되었다.

  • 한때 Big Chungus로 많은 인기를 얻었던 미국 인터넷 밈은 크렘펫이 연출한 작품 Wabbit Twouble 편에서 원본 장면을 찾아볼 수 있다.



4. 작품 목록[편집]


  • 루니 툰 & 메리 멜로디즈 단편 (1937년 ~ 1946년 작품들)
  • Time For Beany (실사 인형극, 1949년 ~ 1955년)
  • Beany and Cecil TVA (1962년)


5. 관련 인물[편집]



  • 동료
    • 텍스 에이버리[5]
    • 프리즈 프레렝
    • 로버트 매킴슨
    • 밀턴 그레이(Milton Gray)[6]
    • 준 포레이
    • 월트 디즈니[7]
    • 스탠 프리버그(Stan Freberg)[8]

  • 상사
    • 리언 슐레진저(Leon Schlesinger)
    • 에드워드 셀저(Edward Selzer)[9]
    • 휴 하먼(Hugh Harman) & 루돌프 아이싱(Rudolf Ising)[10]

  • 전 동료
    • 척 존스 : 1970년대 초반에 빚어진 관계 악화로 인해 완전한 절연까지 가진 않았지만, 서로간의 화해를 이뤄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 멜 블랭크 : 10년간 서로 같은 스튜디오에서 일해 구면이 짙었지만, 멜 본인의 자서전에서 함께 일해야 했던 최악의 감독이자 이기주의자로 서술하였다.

  • 기용한 애니메이터, 연출가
    • 롯 스크라이브너(Rod Scribner)
    • 매니 굴드(Manny Gould)
    • 로버트 캐논(Robert Cannon)
    • 필 먼로(Phil Monroe)
    • 빌 멜렌데즈[11]
    • 밥 기븐스(Bob Givens)
    • 노먼 맥케이브(Norman Mccabe)
    • 버질 로스
    • 칼 W. 스털링(Carl W. Stalling)[12]

  • 추종자
    • 랄프 박시
    • 존 크릭팔루시 : 그의 작품에 전반적인 영향을 끼친 애니메이터 중 1명이자 멘토. 이후 크렘펫의 가족들로부터 지지를 받아 DiC 엔터테인먼트, ABC와 함께 Beany and Cecil TVA를 1988년에 리메이크했다.
    • 레너드 말틴
    • 제리 백(Jerry Beck) : 애니메이션 역사가이자 웹사이트 CartoonResearch의 설립자.
    • 마르타 시걸(Martha Sigall) : 1930년대 중반부터 40년대 초반에 리언 슐레진저 프로덕션에서 일한 잉커(inker)이자 몇 안되는 루니 툰의 여성 스태프.
    • 에릭 골드버그


6. 관련 문서[편집]



[1] 만화 뽀빠이의 단행본을 발간한 출판사.[2] 환경상 흰개미가 나올 정도로 열악한 상태의 벙갈로였다는 뜻.[3] 사실 단편이 제작된 계기는 크렘펫과 접촉했던 한 흑인 뮤지션이 왜 흑인을 다룬 만화가 없는지에 대한 물음으로써 시작되었으며, 1942년 즈음 크렘펫이 다닌 한 흑인 뮤지션들이 활동한 클럽의 밴드도 단편 제작에 참여하였고 그들 또한 이 만화를 보고 만족해했었다고 한다. 다만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 흑인 패러디 버젼인 이 작품에 흑인들이 식인종처럼 묘사되는 스테레오 타입으로 인하여, 꼭 정치적 올바름 탓으로 악평당했다고 할 작품도 아니었고 개봉 당시에도 굉장히 불쾌하다고 그 묘사를 비난하던 사람들도 있었다. 덕분에 이 작품은 (공식 매체론) 비디오도, 그 어떤 매체로도 발매되지 않았다.[4] 그런데 딸 루스 크렘펫의 증언에 의하면 70년대 후반, 미국 흑인 영화 제작자들을 기리는 한 행사에서 이 단편이 상영된 적이 있었는데 플로이드 노먼을 포함한 흑인 청중들이 (단편을 감상한 후) 엄청난 박수로 화답하였으며, 농담이 너무 뻔뻔스럽고 지나치게 공격적이어서 차마 화를 내지 못했던 흑인 관객들도 있었다고 한다.[5] 1970년대 중반에 빚어진 크렘펫과 존스 간의 관계 악화로 인해 말년에 크렘펫에 대해 애매하게 생각했던 시기도 있었지만, 존스처럼 거의 절연에 가까운 사이로 악화되진 않았다. 연출적인 면에선 에이버리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고 그가 떠난 이후 (에이버리의 개그 연출을) 적극적으로 계승하면서 극대화시켰다고 할 수 있다.[6] 위 문단의 논쟁이 일어났을 때 크렘펫을 적극적으로 지지해줬던 친구이자 애니메이션 역사가.[7] 활동 초창기에 서로 만난 사이였었고, 크렘펫이 제작한 일부 단편과 인형극 TV 프로그램에서 월트가 제작한 작품들을 적극적으로 패러디하기도 했다.[8] 크렘펫이 주연한 TV 인형극에서 배우로 잠시 활동한 경력이 있지만, 1956년 밥한테 본인이 제작할 TV 인형극에 대한 소송을 당한 적이 있었다. 관련 자료 참조 [9] 루니 툰의 2대 제작자, 전임 제작자 리언이 물러난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워너브라더스를 떠났기 때문에 오랜 커넥션은 유지하지 못했다.[10] 루니 툰의 초대 감독, 크렘펫을 자신의 스튜디오에 고용시킨 애니메이터 콤비이기도 했다.[11] 1940년대 초에 크렘펫의 휘하 애니메이터로 일했으며, DVD 인터뷰 영상과 크렘펫이 연출한 일부 작품의 코멘터리 인터뷰로 출연한 경력이 있다.[12] 루니 툰 & 메리 멜로디즈 단편의 1930년대 후기 ~ 50년대 중기 음악 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