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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요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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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正
(? ~ 1016)
1. 개요[편집]
요나라의 인물.
2. 생애[편집]
2.1. 생애 전반[편집]
출신 불명의 인물로 통화 연간 초에 진사시에 급제했다. 통화 23년(1005) 11월 정사사인 관직에 있으면서 태사 야율분노와 함께 북송에 신년을 하례하는 황후의 사신으로 다녀온 일이 있다.
2.2. 거란의 2차 침입[편집]
통화 28년(1010) 9월 추밀직학사 고정은 합문인진사 한기(韓杞)와 함께 고려에 향했다. 당시 거란은 강조의 정변과 고려 목종의 시해를 이유로 이미 군을 일으킨 상태였다. 같은 해 10월 고려에 도착한 고정 등은 황제 요 성종의 선지를 전하고 당시 고려 국왕인 왕순을 추궁했다. 고정은 황제의 뜻을 전달하고 군영으로 돌아가 얼마 뒤 우복야로 임명됐다.
1010년 12월, 거란군 진영에 입근(入覲)을 요청하는 왕순의 표문이 전달됐다. 삼군(三軍)이 패하고 국경의 주군(州郡)이 모두 함락돼 고려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고정은 황제의 명에 따라 기병 1,000명을 인솔해 고려 국왕을 마중하러 나갔다. 고려측 기록에 따르면 한기가 기병 200명을 이끌고 서경성 서문으로 가서 고려 국왕은 조서를 들고 나오라고 독촉했다. 그런데 서경성에서 이를 지켜보던 동북계도순검사 탁사정이 중랑장 지채문과 상의한 뒤 기병을 이끌고 서문 밖으로 돌격해 한기 등을 습격했다. 이 기습에 한기는 죽고 2백명의 기병은 죽거나 포로로 잡혔다.
길에서 묵던 고정도 탁사정에게 포위를 당해, 휘하 기병이 많이 죽거나 다치는 가운데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다. 요 성종은 항복하려는 듯했던 고려의 말만 믿고 가벼이 행동한 것을 후회하며 많은 병사를 잃고 돌아온 고정의 죄를 용서했다.
2.3. 생애 후반[편집]
통화 29년(1011) 3월 고정은 공부시랑 북원추밀부사에 임명됐다. 개태 2년(1013) 2월 각도(道)에 파견돼 감옥을 안찰했으며 개태 5년(1016)에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