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사(遼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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蕭滴冽
생몰연대 미상
요나라의 인물. 자는 도녕(圖寧).
소적열은 일찍이
거란 요련(遙輦)씨 선질가한(鮮質可汗)의 궁인이었다. 중희 연간
[1]에 진국군(鎭國軍) 절도사를 요령하였다.
소적열은 중희 6년(1037년)
흥종의 조서를 받들어
북송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는데, 도중에 발을 다쳐 절름거리게 되었다. 하지만 소적열은 이를 흥종에게 알리지 않아 흥종의 분노를 샀고 장형을 받은 뒤, 동첨남경유수사(同簽南京留守事)로 좌천되었다.
뒤에 소적열은 정강군(靜江軍) 절도사라는 직함을 받았고, 군목도림아(群牧都林牙), 우이리필(右夷離畢)을 역임하였으며 재간이 있다는 칭송을 받았다. 뒤에 요나라가
서하를 정벌할 때 서하의
경종이 항복을 청하자, 흥종은 서하가 항복한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 소적열을 서하로 파견하였고, 소적열은 흥종의 명령을 받고 서하에서 돌아왔다.
소적열은 북원추밀부사(北院樞密副使)와 중경 유수를 맡았다가, 1050년 서경 유수로 발령받았고 임지에서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