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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손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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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蕭遜寧
(? ~ 997)
요나라(= 거란)의 장군으로 본명은 소항덕(蕭恒徳) 또는 소긍덕(蕭恆德)이었다. 한국에서 부르는 소손녕의 손녕(遜寧)은 소항덕의 자로,《고려사》에서 본명이 아닌 소손녕으로 나오기에 이 이름으로 더 알려졌다.[1] 가족 중에 형으로 제3차 여요전쟁때 거란군 사령관이었던 소배압이 있다.
2. 생애[편집]
983년 거란 야율씨 황실의 황녀인 월국공주[2] 를 아내로 맞아 제5대 황제인 경종과 예지황후, 즉 승천황태후 소작의 부마가 되었으며 이후 동경유수가 되었다. 그래서 소배압과 소손녕은 형제이자 동서이기도 했다. 소손녕도 형 소배압처럼 북송과의 전쟁에서 실전 경력을 쌓았는데 중요한 요충지인 연운 16주를 두고, 986년에 벌인 북송과의 전쟁에서 선봉대가 되어 성을 함락시켰으나 화살에 맞아 부상을 입었다. 당시 성종의 모후로 섭정이었던 승천태후 소작[3] 은 직접 소손녕을 문병하고 약까지 직접 내려주었다. 회복한 뒤에도 북송과의 전쟁때 계속 선봉에 나서 전공을 세움으로써 고모인 승천태후의 총애를 받았다.
993년 제1차 여요전쟁이 시작되면서 군대를 이끌고 고려에 쳐들어왔다. 봉산에서 고려군을 격파하고(봉산 전투) 남하하다가 안융진 전투에서 대도수와 유방 등의 분전으로 패배한 후, 서희와의 담판으로 철군했다. 이때 소손녕은 자신의 부대가 800,000명이라고 허풍을 쳤지만 사실 거란의 군 편제상 그의 휘하 부대가 그 정도의 대군이었을리는 없다. 정확한 병력수가 사서에는 없지만 거란군의 경우, 원정을 할때 총사령관급인 '도통'을 두는데 소손녕은 당시 도통도 아니었고, 도통이 없는 거란군은 대개 기병 60,000명 미만이었으니 실제로는 최대로 잡아도 60,000명이었을 것이다.[4][5]
사실 당시 거란군은 이렇다 할 영토나 요충지도 점령하지 않고서 다짜고짜 "항복하라"는 공갈포를 쳤지만 이때 소손녕의 이 말이 허풍임을 서희 혼자만 간파했고, 고려 조정은 대부분 서경 이북의 땅을 떼어 주면서 항복하자는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할지론) 그러나 때마침 안융진에서 고려군이 승리를 거두자 분위기가 바뀌게 되었고, 마침내 서희와 소손녕 사이에서 협상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 결과 강동 6주라는 요충지를 고려에 넘겨주어 이후의 전쟁에서 거란군이 고전하는 원인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소손녕은 서희의 주장을 납득해 자신이 목적을 이뤘다고 생각해서 서희에게 7일 동안 잔치를 베풀며 낙타 10두, 말 100필, 양 1,000마리, 비단 500필이라는 엄청난 선물을 줬다. 아무래도 문무를 겸비한 형 소배압과는 달리 나름 무용은 있었으나 정치와 전략을 생각하는 머리는 모자랐던 듯하다고 서술되는 경우가 많지만[6] 이런 주장이 잘못되었다는 견해도 있다. 어쨌든 당시의 상황을《요사》에서는
라고 기록했지만 현실은 시궁창이었다."고려 왕 왕치가 항복하므로 땅을 떼어 주었다."
이 고려 원정을 공적으로 평가했는지 성종 야율융서 치세하의 거란 조정으로부터 '계성갈력공신'(啟聖竭力功臣)의 칭호를 받았고,(994년) 그 뒤 화삭노(和朔奴)라는 장군의 휘하에서 옛 발해 유민들의 세력인 올야(兀惹) 정권에 대한 원정에 참전했다. 당시 올야국은 거란군과 싸우기 전에 항복했으나 소손녕이 항복한 올야인들을 포로로 취급하고, 함부로 다뤄서 올야인들의 거센 저항을 받게 되었다. 화삭노는 퇴각을 생각했으나 소손녕은 공을 세우기 전에는 퇴각할 수 없다며 강력하게 반발했다. 이에 화삭노는 동남 방향으로 진격해서 고려와의 북쪽 경계까지 이르렀으나 식량 보급도 끊기고 많은 사상자를 낸 채 대올야 원정은 실패로 끝나게 되었고 이 책임을 물어 소손녕은 작위를 빼앗기게 되었다. 그래도 996년에 행군도부서(行軍都部署)에 올라 포로모타부(蒲盧毛朵部)를 공략했다.
997년 아내인 월국공주가 병에 걸리자 장모이자 고모인 승천태후 소씨가 현석(賢釋)이라는 궁녀를 보내 간병을 시켰는데 소손녕이 이 궁녀와 간통을 하게 되었다. 쇠약해져 있었던 월국공주는 이를 알고 분에 못 이겨 끝내 회복하지 못한 채 죽고 말았는데 이 사실을 듣고 격노한 승천태후가 사위이자 조카였던 소손녕을 잡아서 처형했다.[7] 사후에는 난릉군왕(蘭陵郡王)에 추봉받았고 아들인 소필적(匹敵)이 소손녕의 뒤를 이어 '난릉왕'의 작위를 받았으며 그 역시 공주와 결혼했다.[8] 이 비참한 최후 때문인지 한국에서는 제1차 여요전쟁 이후 회군한 뒤, 800,000명을 이끌고 갔다가 땅만 떼주고 왔다며 격노한 요성종에게 맞아 죽었다고 잘못 알려져 있기도 하다.
3. 대중매체[편집]
[1] 비슷한 예로 신라의 삼국통일전쟁 때 한반도로 온 당나라 장군 소정방(蘇定方)도 있는데, 정방(定方)은 자(字)이고, 본래 이름은 소열(蘇烈)이었다. 덧붙이자면 당시 거란의 최고 명장인 야율휴가(? ~ 998)라는 사람의 자도 손녕이었다. 한자까지 遜寧으로 같다.[2] 월국공주 야율씨는 제5대 경종과 예지황후(승천황태후) 소작 사이의 딸이었다. 따라서 제6대 성종 야율융서의 누이였다.[3] 소배압과 소손녕 형제의 고모였다. 즉 성종 야율융서에게는 소씨 형제가 이종사촌들이었다.[4] 안주섭의 저서인《고려거란전쟁》에서 발췌했다.[5] <토크멘터리 전쟁사>에서도 0 하나는 빼야할 것이라고 언급했다.[6] 전쟁은 기본적으로 국가 간의 정치 / 외교적인 현안을 무력으로 해결하기 위해 동원되는 최후의 수단일 뿐이다. 사령관급의 고위 관료가 정세 판단을 잘못하면 무의미한 전투에 휘하 장병들만 갈아넣는 상황이 된다.[7] 채널A <천일야사> 제149회에서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상하게도 소손녕이 너무 젊게 나왔던 데다가 본명인 '소항덕'으로 나왔다.[8] 훨씬 뒤의 일로 요성종의 붕어 이후 측실이자 요흥종의 생모인 소누근이 정실황후인 소보살가를 모함하여 죽인 사건이 있었는데, 소필적은 소보살가에게 충성을 다하다가 함께 죽을 처지에 몰리게 되었다. 이에 부인이 여진 땅으로 도망가자고 했으나 거절하고 의연하게 죽음을 맞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