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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율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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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耶律曷魯
(872 ~ 918)
요나라의 개국공신. 자는 공온(控溫)이고 다른 자는 홍은(洪隱)이며 질랄부(迭剌部) 사람이다. 할아버지는 야율갑마갈(耶律匣馬葛)로 야율균덕식(耶律勻德寔)의 형이다. 아버지 야율우사(耶律偶思)는 요련(遙輦)에서 본부이리근(本部夷離堇)이였으며 야율갈로는 그의 장자이다.
2. 생애[편집]
어린 시절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와 같이 놀았는데 종부 야율석로(耶律釋魯)가 기특하게 여겨 말하길 "우리 가문을 일으킬 사람은 반드시 저 두 아이일 것이다." 하였다. 야율아보기가 장성한 후에도 서로 말과 가죽옷을 교환할 정도로 사이가 좋았으며 그리하여 야율아보기를 섬기며 지내게 되었다.
어느 날 야율활가(耶律滑哥)가 종부 야율석로를 살해하는 일이 발생하였는데 야율아보기가 분노하여 용서하지 않을 것을 말하자 야율갈로가 야율아보기에게 복종하였다. 시간이 지나 아버지 야율우사가 병에 걸려 위독하자 야율갈로를 불러 아우들과 야율아보기를 따르도록 하였다.
야율아보기가 달마월사리(撻馬狘沙裏)가 되어 본격적으로 부족의 일에 관여하자 야율갈로는 기병을 이끌고 소황실위(小黃室韋)를 내부하게 하였다. 또 월올(越兀)과 오고부(烏古部)를 정벌하고자 할 때 야율갈로가 선봉에 서서 전투에 공이 많았다.
야율아보기가 질랄부이리근(迭剌部夷離堇)이 되자 해족(奚部)을 정벌하고자 하였는데 저항이 만만치 않았다. 이에 야율갈로가 홀로 들어가 해족을 회유하니 그들이 항복하였다.
야율아보기가 우월(于越)에 임명되고 흑치자실위(黑車子室韋)를 토벌하는데 유주(幽州)의 유인공(劉仁恭)이 양아들 조패(趙霸)를 보내 실위를 구원토록 하였다. 야율갈로가 도산(桃山)에 군사를 매복하고 조패의 군대가 절반 이상 지나가기를 기다리다가 태조와 합류하여 격파하니 많은 무리를 참획(斬獲)하고 실위가 항복하기에 이르렀다.
흔덕근가한(痕德堇可汗)이 사망하자 군신들이 유언을 받들어 야율아보기를 세우려고 했으나 야율아보기가 선조 야율아리(耶律雅裡)의 일을 들어 거절하였다. 이에 야율갈로가 3번의 설득 끝에 그를 설득시킬 수 있었다.
다음 날 태조(太祖)가 제위에 오르자 야율갈로를 총군국사(總軍國事)로 삼았다. 또 모든 부에서 뛰어나고 굳센 이들 2천여 명을 뽑아서 궁궐의 행영을 채우고 야율갈로와 소적로(蕭敵魯)로 하여금 이들을 거느리도록 하였다. 그 후 얼마 안 가 아우들의 난이 일어나자 태조는 야율갈로를 총령군사(總領軍事)로 임명하여 그들을 평정하게 하고 야율갈로를 질랄부이리근으로 삼았다.
신책(神冊) 2년, 유주를 칠 때 종군하여 후당(後唐)의 절도사(節度使) 주덕위(周德威)를 가한주(可汗州) 서쪽에서 격파하고 유주를 포위하였다. 날이 더워 태조가 야율갈로와 노국용(盧國用)에게 포위하고 지키게 하였는데 갑자기 적의 구원병이 나타나 야율갈로가 퇴각할 수 밖에 없었다.
신책 3년 7월, 이윽고 황도(皇都)가 정비되어 낙성식(落成式)을 하였는데 이 해에 야율갈로가 병을 얻어 47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태조가 야율갈로를 장사지낸 산을 우월곡(于越峪)이라 부르고 조서를 내려 비석을 세워 공을 기록하도록 하였다.
청령(清寧) 연간에는 명을 내려 상경(上京)에 사당을 세우게 하였다.
3. 여담[편집]
야율아보기가 이극용(李克用)과 회담할 때 이극용이 야율갈로를 보고 기세가 훌륭하다 했다고 한다.
형제 관계로 야율적렬(耶律覿烈)과 야율우지(耶律羽之)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