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사(遼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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耶律瑤質
생몰년도 미상
요나라의 인물. 자는 발리근(拔里堇).
적경궁 사람으로 학문에 독실하고 청렴하면서 올곧아 세상을 경륜할 뜻이 있었으며, 992년에 적경궁의 관리가 되었다.
성종은 야율요질이 정직하고 강직한 사람이라면서 나라가 위태로울 때 말을 숨겨서는 안된다고 했으며, 성종이 야율요질의 조언이 여러 차례 받아들였다.
1010년에
고려를 정벌하면서
강조를 통주에서 격파할 때
현종이 항복을 청하자 여러 신하들이 받아들이는 것이 좋다고 했으나, 야율요질은 처음에 한 번 싸우다가 패해서 항복을 요청하는 것은 속임수라서 그들의 힘이 꺾일 때를 기다려서 받아도 늦지 않을 것이라 했다.
얼마 안 있어서 현종이 도망가고 청야 전술을 썼기에 아무 것도 얻지 못했으며, 그 무리들이 험한 지세를 의지해 진을 치고 공격해도 항복하지 않자 야율요질이 계책으로 항복시켰다.
발탁되어 사번부상온이 되었으며, 야율파적 휘하로 임명되어 그 밑에 있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는데, 성종이 이 자리에 오래 두지 않을 것이라 했으며, 야율요질은 야율파적을 거치지 않고 중앙에 상주할 수 있었고, 관직에 있던 중에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