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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려(요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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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張礪
(? ~ 947)
요나라의 인물. 본래 한인(漢人)으로 자주(磁州) 사람이다.
2. 생애[편집]
장려는 본래 후당(後唐)에서 장서기(掌書記)를 거쳐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지내고 있었다. 석경당이 군사를 일으키자 말제(末帝)는 장려를 초토판관(招討判官)으로 삼아 조덕균(趙德鈞)을 따라 하동(河東)에서 장경달(張敬達)을 구원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장경달이 패하자 장려는 요나라로 망명했다.
태종(太宗)이 장려의 강직함과 문채있음을 보고 그를 한림학사로 발탁했다. 장려는 평소 감추지 않고 직언하였는데 황제가 유익하게 생각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향 생각에 꾀를 내 도망가려다가 기병들이 추격해 붙잡혔다. 태종이 달아난 이유를 묻자 장려는 북방의 토속과 음식, 거처들이 익숙하지 않아 항상 한숨 쉬며 울적했기에 도망갔다고 말하였다. 이에 태종은 통사(通事) 고언영(高彥英)에게 잘 대접하라 이르렀는데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냐며 다그치고 장려에게 사과하였다.
회동(會同) 초, 한림승지(翰林承旨)로 승진하고 이부상서(吏部尚書)를 겸하여 태종의 후진(後晉)정벌에 따라나섰다. 이후 개봉부(開封府)에 입성하니 소한(蕭翰), 야율랑오(耶律郎五), 마답(麻答) 등 여러 장수들이 살인과 약탈을 저질렀다. 장려가 민심을 위해 중국은 요나라인이 아닌 한인이 다스려야 한다고 아룄지만 태종이 불허하였다.
장려는 이후 승승장구 하여 우복야(右僕射)와 문하시랑(門下侍郎) 평장사(平章事)를 겸하였다. 얼마 뒤 태종이 북쪽을 돌아보다 난성(欒城)에 이르자 붕어하였다. 그 때 장려는 항주(恒州)에 있었는데 소한과 마답이 군사를 이끌고 그의 집을 에워쌌다.
장려가 와병 중에 밖으로 나왔는데 소한이 그에게 말하길 "당신은 무슨 까닭으로 선제에게 국인이 절도사를 하면 안된다고 말하였는가? 나는 선제의 친척으로 정벌의 공이 있어 선제께서 나에게 이 곳을 지키게 하셨다. 선무군절도사(宣武軍節度使)로써 다스릴 때 당신 혼자 안된다고 하였다. 또 야율해리(耶律解里)와 함께 사람의 재물과 자녀를 약탈했다고 나를 참소했으니 지금 반드시 너를 죽일 것이다!" 라며 그를 구속했다.
장려가 대항하며 소리내 말하길 "대체로 이 국가의 안위가 달려 있어 나는 참언을 한 것이다. 죽이고자 한다면 곧 죽을지언데 어찌하여 쇠사슬을 채우는 것이냐?" 하였다.
마답이 장려를 제멋대로 죽이면 안된다고 하자 소한이 이에 그만두었다. 이날 저녁 장려가 몹시 분하고 원통해하며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