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사(遼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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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知古
(? ~ ?)
요나라의 인물. 본래 한인(漢人)으로 계주(薊州) 옥전(玉田) 사람이다.
한지고는
태조(太祖)가 계주를 침공했을 때 6살의 나이로
요나라로 끌려갔다. 그 후 황궁에서 시중을 들었는데 별로 눈에 띄지 못하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 한지고는 바라던 것이 뜻대로 되지 않자 마침내 앙심을 품고 도망치는 일이 발생했다. 그에게는 한광사(韓匡嗣)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태조와 매우 가까웠다. 그의 아들이 태조에게 부탁하자 태조가 한지고를 불러 함께 대화를 나누었다. 대화를 나눈 태조는 그를 인정하고 참모로 삼아 따르게 하였다.
신책(神冊) 초, 창무군절도사(彰武軍節度使)로 제수했다. 오래지나 신임이 두터워지고 총지한아사사(總知漢兒司事)로 삼아 모든 나라의 예의를 아우르도록 하였다. 당시 의법(儀法)이 오래되었는데 한지고가 옛 법의 근원과 나라의 풍속을 참작하고 한(漢)의 법식을 섞어 백성들로 하여금 쉽게 알 수 있도록 하였다. 얼마 안지나 좌복야(左僕射)의 벼슬을 주었고
강묵기(康默記)와 함께
발해(渤海)를 정벌하는데 공을 세워 중서령(中書令)으로 삼았다.
천현(天顯) 연간에 죽었다.
지략이 뛰어나고 식견이 있었다고 한다.
좌명공신(佐命功臣) 중 한 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