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사(遼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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耶律敵魯
(? ~ ?)
야율적로는
요나라의 황족 오원부(五院部) 출신으로, 의사 겸 관료다. 자는 살불완(撒不碗).
야율적로는 의술에 정통해 환자의 낯빛만 보고도 병의 원인을 알았으며, 직접 진찰하지 않더라도 치료하는데 부족함이 없었다.
성종 초인 통화(統和) 연간 초반에 대승상 한덕양(韓德讓)의 천거를 받아 벼슬이 절도사에 이르렀다.
야율적로가 의사로서 병을 고친 일화가 『요사』 「방기 열전」에 남아있다. 추밀사
야율사진(耶律斜軫)의 처가 깊은 병을 앓았는데 여러 의사가 진찰해도 치료하지 못했다. 야율적로가 진찰하고 말하기를,
心有蓄熱, 非藥石所及, 當以意療。因其聵, 聒之使狂, 用泄其毒則可.
마음에 열이 쌓여있으니 약이나 침이 미치지 못하고, 마땅히 의(意)로서 치료해야 한다.[1]
의(意)로 치료한다는 것은 마땅히 규정된 치료법이 없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치료하겠다는 뜻으로 보인다. '의자의야(醫者意也)' 등의 표현에서 짐작할 수 있다.
그가 청각 장애인이니, 시끄럽게 해서 미치게 한 뒤에 그 독을 빼내게 하면 곧 나을 것이다.
그리고 북과 징을 앞에 가져와 크게 치도록 처방했다. 이튿날 야율사진의 처는 과연 미쳐서 부르짖으며 화내면서 욕을 했고, 힘이 다해 멈춘 뒤에는 마침내 병이 나았다. 야율적로의 치료는 대체로 이런 모습이었기에 다른 사람들은 헤아릴 수가 없었다.
야율적로는 80세의 나이로 죽었다.
동시대인 통화 연간 후반에
야율적로(耶律敵魯, 열전에서는 야율적록的琭)라는 동명이인이 있는데, 요사 본기와
고려사에서 언급되는 인물은 이 사람이 아니라 동명이인 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