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사(遼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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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요나라의 황족. 소자(小字)는 상가(常哥)로,
야율적로의 여동생이다.
야율상가는 어려서부터 호탕하고 뛰어났으며 어른의 풍모가 있었다. 장성한 뒤 태도와 행실을 닦았고, 스스로 결혼하지 않기를 맹세했다.
야울상가는 시문에 능했는데 창작에 서두르지는 않았다. 함옹 연간(1065~1074)에 시정을 풀어낸 글을 지어
도종에게 칭찬을 듣는다. 당시 추밀원사
야율을신이 그 재능을 연모해 여러 번 시를 써 구혼했는데, 야율상가는 그때마다 답시를 써 돌려보냈다. 야율상가의 답장에 자신을 조롱하는 내용이 담겨있음을 안 야율을신은 이를 마음에 담아뒀다.
대강 3년(1077) 황태자
야율준이 야율을신의 무고로 증거도 없이 탄핵돼 면직당했다. 마침 오빠 야율적로가 진주(鎭州)에 귀양을 갔는데 야율상가는 함께 베옷을 입고 거친 음식을 먹었다. 왜 사서 고통을 받느냐는 사람들의 말에 야율상가는 "황저(皇儲)께서 죄가 없음에도 폐위당하셨는데, 나같은 이들이 어찌 좋은 밥 먹고 편히 자겠는가."라고 대답했다. 태자가 요절한 뒤 애통함을 이기지 못했고 70세의 나이로 집에서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