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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율자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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耶律資忠
(? ~ ?)
1. 개요[편집]
요나라의 인물. 자는 옥연(沃衍), 아명은 차랄(劄剌). 고려 측 기록에서는 '야율행평(耶律行平)'이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2. 생애[편집]
야율자충은 배움이 넓고 글솜씨도 뛰어났으나 40세에 이르도록 출사하지 못했다. 요성종때 숙위에 임명되고, 개태 연간에 중승에 제수된다. 당시 요는 고려의 강동 6주 지배를 인정하고, 북송 대신 고려와 교류하고 있었다. 요나라 측에서는 이 강동 6주를 자신들이 고려에 내려준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고[1] , 고려 왕이 친조를 거부하니 6주를 다시 돌려받으려고 했다. 야율자충은 1013년 4월 고려가 6부를 점유한 것을 질책하고 7월 반환을 요구했으나 소득 없이 돌아가야 했다. 이 실패로 권귀(權貴)들로부터 비난을 듣고 상경부유수로 폄출됐다.
야율자충은 다시 고려에 파견됐는데, 그 사이 양국간 군사적 충돌로 민감해진 고려에서는 1015년 4월 야율자충을 억류해 돌려보내지 않았다. 야율자충은 매일 고국의 임금과 가족을 생각했는데, 이 시기 『서정집(西亭集)』이라는 저술을 남기기도 한다. 요에서도 군신들에게 연회를 베푼 성종이 "자충 또한 이런 즐거움이 있을까?"[2] 라고 했다고 전한다. 여요전쟁이 종식된 뒤 고려는 표문을 보내 요와 외교 관계를 회복하기를 청했다. 6년을 수감된 지자리(只刺里) 등 포로들은 본국으로 송환됐으며, 마찬가지로 억류된지 6년이 돼가던 야율행평은 1020년 3월 본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성종은 교외까지 나와 그를 반겼으며 연회를 열고 수일간 금중에서 머무르도록 했다.
성종이 "짐이 경을 걸맞게 대접하지 못했으니 추밀로 삼으려고 하는데, 어떠한가?"[3] 라며 제안하는데 야율자충은 "신은 재주가 없으니, 감히 조서를 받들 수 없습니다."[4] 라며 사양했고, 대신 임아 지척은사에 임명됐다. 또 연좌돼 가산이 전부 몰수됐던 동생 야율소도 다시 황족으로 대우됐고 가산이 환원됐으며 외척의 딸과 결혼했다. 황제의 총애를 받던 추밀사 소합탁(蕭合卓), 소사 소파가(蕭把哥)에게 굴복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꾸짖어 관직이 박탈됐다. 수년 뒤 지내원성사로 폄출되고 보안·소덕 두 군(軍)의 절도사를 지냈다.
성종이 붕어했음을 듣고 장례에 참여했으며, 성종의 관 앞에 엎드려 크게 슬퍼하면서 "신은 다행스럽게도 임금의 총명함을 만났으나 뜻밖에 참소를 당해 견마의 보답을 할 수 없었습니다."[5] 라고 하고 기절했다가 깨어난다. 흥종은 의원을 보내 치료하게 했다. 흥종 때는 국구, 시중에게 우국심이 없음을 간언하고 당나라 경복 연호를 재사용하는 것을 반대하다 권력자의 미움을 사 외직으로 쫓겨났으며 임지로 가던 길에 죽었다.
3. 가족관계[편집]
- 형: 야율국류(耶律國留)
- 동생: 야율소(耶律昭)
거란의 황족 삼부방 중 중부방(仲父房)계 출신이다.